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크루이프 (문단 편집) === [[FC 바르셀로나]] - [[드림팀]]의 수장 === 1988년에 주젭 유이스 누녜스 바르셀로나 회장은 크루이프를 감독에 앉혔다. 누녜스 회장의 리빌딩 의지를 등에 업은 크루이프는 기존 주전 선수를 거의 전부 방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영입하여 사실상 새로운 팀으로 재창단했다. 크루이프는 부임하자마자 기존 선수들 중에서 [[게리 리네커]]를 제외한 주전 선수들을 전부 방출했다.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대신해서 누녜스 회장이 악역을 자처하며 기존 선수단을 정리하면서 시시때때로 충돌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문에 지금도 좋지 않은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녜스 회장은 크루이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크루이프가 원하는 선수들을 모두 영입해 주었다. 그리하여 크루이프는 부임 첫 시즌에만 13명의 선수를 영입했는데,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온 [[호세 마리 바케로]]와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치키 베히리스타인]] 등 바스크 출신 선수들과 [[훌리오 살리나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던 [[로날드 쿠만]], 유벤투스에서 온 [[미카엘 라우드루프]], [[CSKA 소피아]]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인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기존 선수단 중에서는 팀의 에이스였던 리네커만 유일하게 남았으나, 크루이프는 리네커를 강제로 [[윙어]]로 포변시켰고, 이에 리네커의 불만이 높아져 1988-89 시즌이 끝나고 리네커 역시 이적시키고 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바르사 감독시절 크라위프.jpg|width=100%]]}}} || || ''' {{{#000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 || 이렇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만을 모아 완전히 판을 새로 짜게 된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코치처럼 활용하면서 선수들에게 이미 아약스 시절에 구축한 [[티키타카]]와 [[토탈 풋볼]]을 바르셀로나에 이식했다. 당시 스페인 언론은 크루이프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게 된 이 팀을 ''''[[드림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이루었지만 첫 2~3시즌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 사이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5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하여 크루이프는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경질설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약 4년 간 라리가 4연패, 창단 이후 첫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 등을 달성했다. 다만 1994년 이후 크루이프 감독과 선수들 간의 잇따른 불화가 불거지며 드림팀은 모래성처럼 와해되고 말았다.[* 참고로 국내에서는 이당시 바르셀로나를 크루이프호라고 부르지만 해외 문서에서는 대부분 바르셀로나 드림팀으로 언급된다. 크루이프 감독의 지도력도 있지만 그보다 선수 자원 자체가 워낙 걸출했기에 선수들의 활약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고 있다.] 유소년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하며 [[라 마시아]] 건립 및 유소년 교육에 신경을 쓴 크루이프는 [[스포티파이 캄 노우|캄 노우]] 경기장 옆에 위치한 미니에스타니를 찾아 B팀의 어린 선수들의 동태도 살폈다. 당시 바르사의 B팀은 [[카를레스 렉사흐]] 감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크루이프는 당시 우측 미드필더로 뛰던 [[펩 과르디올라]]를 [[중앙 미드필더]]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 뒤 1990년에 그를 1군 선수로 발탁해 팀의 심장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피보테(pivote)로 불리는 이 위치는 현대 축구에서 상대와 중원 대결에서 수비를 주로 펼쳐야 되는 포지션이기에 호리호리한 체형에 기술이 좋은 과르디올라를 선발한 것이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크루이프는 이 위치에서 공을 가지고 공격을 펼쳐 라인 전체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현재의 바르사 팀 스타일, 그러니까 소유와 지배 그리고 전진 압박을 통한 지속적인 공격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이 '크루이프의 축구'에서 피보테는 가장 영리하고 볼 관리 능력이 가장 뛰어나야 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수비 면에서의 피드백은 그 뒤에 배치된 쿠만과 풀백 수비진이 커버했다. 전방으로 쏠린 대형에서는 수비적인 위험 부담을 수반하나 공격을 최선의 수비로 택한 크루이프의 축구는 부임 첫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내용과 결과 면에서 일거양득을 이루어 세계 축구의 진보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만들었지만 크루이프 감독의 바르셀로나는 처음에는 기대에 못 미쳤다. 특히 첫 [[엘 클라시코]]는 실망스러웠다. 1988년 10월 22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2-3으로 졌다. 하지만 당시 바케로, 고이코에체아, 베히리스타인 등 새로 가세한 선수들이 많아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패인이다. 이에 크루이프는 '충분히 비길 수 있는 경기였다. 1:2 상황에서 쫓아간 선수들에게 만족한다'라고 했다. 이어 1989년 4월 첫날의 안방 경기에서 무득점으로 비기면서 숙적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4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드림팀은 절치부심하여 1989년 10월 7일에 처음으로 엘 클라시코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일등공신이 당해 영입한 쿠만과 라우드루프였는데, 이때 쿠만은 [[페널티킥]]으로 2골을 기록해 3-1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15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살라나스가 두 골을 넣었지만 2-3으로 패하면서 크루이프는 경질 위기를 맞았다. 엘 클라시코에서의 패배도 뼈아팠고, 이해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2.bp.blogspot.com/2011-08-17_PARTIDO_38.v1313680313.jpg|width=100%]]}}} || || {{{#000 '''크루이프 감독과 [[펩 과르디올라|{{{#000 과르디올라}}}]]'''}}}[* 과르디올라는 유스 시절, 미드필더로서 전임 감독들인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카를레스 렉사흐]] 등에게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로 인해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박혀 있었다. 실제로 피지컬이 안좋은 건 명백한 사실이였어서 펩의 포텐을 알아본 크루이프 조차 '우리 할머니보다도 느린 미드필더.'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후 뛰어난 테크닉과 패싱 능력, 축구 두뇌를 입증해가며 1991년부터 크루이프가 1군으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팀의 주전으로 성장했다.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훗날 드림팀의 감독으로 [[트레블]]을 달성한다.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펩에게 크루이프는 은사인 셈. [[티키타카]] 전술의 골자인 '짧은 패스를 통한 공의 소유와 압박으로 공간을 선점'은 크루이프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탈 풋볼 철학을 만든 [[리누스 미헬스]]가 있다. 토탈 풋볼을 심화발전시켜 온 정통(?) 라인이 미헬스-크루이프-과르디올라인 셈.] || 이렇게 경질설에 시달리던 크루이프를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1990년 4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었다. 역시 엘 클라시코로 펼쳐진 결승전에서 기예르모 아르모와 살라나스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에 누녜스 회장이 크루이프를 지지하여 그를 유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감정이 격앙된 경기였다. 그 증거로 경기 당시 퇴장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페르난도 이에로]]는 '내게 이 결승전에서 가장 기분 나쁜 부분은 우승컵을 스페인 사람들이 따내지 못한 것'이라고 민족 정서를 자극해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삼프도리아를 꺽고 유로피안 컵을 우승한 크라위프 감독과 그의 드림팀.jpg|width=100%]]}}} || || {{{#000 '''[[UC 삼프도리아|삼프도리아]]를 꺾고 마침내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크루이프 감독[* 가운데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인물이다.]과 그의 드림팀'''}}} || 1990-91 시즌의 엘 클라시코는 1승 1패로 호각이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홈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0-1로 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연속 우승을 끝내버린 상황에서 치뤄졌다.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박수를 받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입성한 바르사가 1984-85 시즌 이후 6시즌만에 우승컵을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91-92 시즌 엘 클라시코는 안방에서 둘 다 비겼다. 이때 쿠만은 원정에서 페널티킥, 안방에서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하여 엘 클라시코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해에는 프랑스의 유명 위성방송채널 카날 플뤼스의 스페인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친선 엘 클라시코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로도 엘 클라시코는 계속해서 시소타기였다. 그러나 이 시즌, 바르셀로나는 당시 [[로베르토 만치니|만치니]]가 에이스로 팀을 이끌던 삼프도리아를 꺾고 팀 역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또한 크루이프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한 세 번째 축구인'''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미겔 무뇨스]], 두 번째는 [[조반니 트라파토니]].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 [[프랑크 레이카르트]], [[펩 과르디올라]], [[지네딘 지단]]이 차례대로 달성하게 된다.] 엘 클라시코의 균형이 완전히 바르셀로나 쪽으로 넘어온 것은 1994년 1월 7일 캄 노우에서 [[호마리우]]가 [[해트트릭]]을 몰아치며 5:0 대승을 거둔 경기부터다. 이는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에 5:0 대승을 이끈 지 정확히 20시즌만에 감독으로써 또 한번 5:0의 역사를 만들어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당한 완패를 설욕해낸 것이다. 게다가 1995년 5월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바르사는 라리가 4연패를 자축했다. 그의 마지막 엘 클라시코는 1996년 2월 10일 캄 노우에서 열린 경기였다. 이때 바르사는 코드로의 두 골과 [[루이스 피구]]의 골로 3:0 완승을 거두었다. 그 전인 1995년 9월 30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라울 곤살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로헤르의 동점골로 비겼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1993-94 시즌 이후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팀의 분위기가 무너진 것이 컸는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는 크루이프의 독선적인 성격과 스타 선수들의 제멋대로인 성격 양쪽이 안좋은 시너지를 낸 것이 컸다. 원래 이전부터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등 자존심 높은 스타플레이어들과 고압적인 태도의 크루이프 감독은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1993년 방탕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호마리우]]까지 합류하면서 팀의 케미는 더욱 빠르게 무너지게 된다. 특히 호마리우를 영입하고 나서 당시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선수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라우드루프]]를 대놓고 천대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라우드루프는 191-92 시즌 라리가 외국인 [[MVP]]로 꼽힐 만큼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베켄바워가 60년대는 [[펠레]], 70년대는 크루이프, 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마라도나]], 90년대는 라우드루프의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라우드루프의 활약은 대단했다. 게다가 라우드루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을 이끄는 리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라우드루프는 크루이프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올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에서 선수로서는 이루지 못한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했고[* 크루이프의 챔스 3연패와 트레블은 아약스 시절에 이룬 것이다.] 당시 드림팀 멤버라면 조만간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라우드루프와 쿠만이 크루이프를 능가하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레전드에 꼽힐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중 쿠만은 지금도 바르셀로나에서 역대급 레전드 중 하나로 대우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팀에서 쿠만을 능가하는 1옵션 에이스이자 심지어 크루이프의 위상조차 넘을지도 모른다고 점쳐지던 라우드루프는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크루이프에게 내쳐지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만다. 크루이프는 1993년 여름 새로 영입한 호마리우를 중용하면서 라우드루프를 교체 명단에서조차 제외하기도 하는 등 대놓고 천대했다. 물론 호마리우가 좋은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크루이프가 대놓고 라우드루프를 무시하던 방식은 당시에도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과 반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사생활과 팀워크에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호마리우가 클럽 밖에서 문란한 사생활로 야기한 성추문 등 구설수는 둘째치고, 클럽 안에서도 연습 시간 때마다 크루이프의 지시를 듣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불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잔소리가 심한 스타일이었고 이미 라우드루프라는 게으른 천재로 인해 골치를 자주 썩이고 있었으나, 그 라우드루프를 한층 능가하는 문제아 호마리우에게는 정작 별말도 못하고 그가 라커룸 안팎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것을 거의 방임했다. 물론 크루이프가 호마리우에게 전혀 잔소리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마리우는 그때마다 능글맞게 응수하거나 심지어 크루이프 감독에게 '당신이나 감독질 제대로 해라, 나는 매 경기 골을 넣는다'며 큰소리쳤다. 똑같이 속썩이던 라우드루프는 그래도 예이~예이~ 하며 적당히 흘리는 식이었는데 호마리우는 그냥 대놓고 개기는 스타일이었고 이런 호마리우를 크루이프는 거의 전혀 컨트롤하지 못했다.[* 호마리우는 무려 '''펠레'''한테도 축구화를 입에 처박아서 주댕이 좀 다물게 해야 한다고 한 인간이다. 다시 말하지만 '''브라질인이 펠레에게''' 그런 말을 했다.]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 팀원들과도 전혀 융화되지 않았다. 그나마 스토이치코프를 제외하면 다른 동료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스토이치코프도 성질이 대단한 인간이라 둘이서 누가 팀의 1인자인가를 두고 제법 충돌했다. 때문에 바로셀로나의 팀 분위기는 개판 일보직전까지 갔다. 호마리우는 그해 경기당 1골에 가까운 놀라운 활약을 펼쳤지만 바로셀로나 팀 자체는 이전에 보였던 응집력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크루이프의 라우드루프 홀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라우드루프가 선발은 커녕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 앉으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 동안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뺄 때 마다 외국인 선수 출전시간 제한 룰을 이유로 들었지만 챔피언스 리그는 이런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벤치 명단에서조차 제외했다.] 당연히 이는 현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라우드루프가 선발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장 카펠로 감독은 라우드루프가 없으니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대놓고 바로셀로나를 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셀로나 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고 결국 객관적 전력에서 한 수 아래라 평가받던 [[AC 밀란]]에 0-4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지금까지도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다 점수차 경기 타이 기록의 불명예로 남아있는 치욕적인 경기였다. 이 충격적인 참패 직후 라우드루프는 비시즌 기간 결국 크루이프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충격을 주었다. 라우드루프의 충격적인 레알 이적 때문에 많이 가렸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드림팀의 핵심 멤버 중 한명으로 팀에서 나름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았던 [[안도니 수비사레타]]를 1993-94 시즌이 끝나고 모양새 좋지 않게 퇴출시킨 것도 바르셀로나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렇게 몇몇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 남아있는 선수들도 전혀 뭉치지 못하며 드림팀은 와해되었다. 물론 크루이프가 팀의 새로운 핵심이라 생각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지만 상술했뜻 문제는 팀의 분위기가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크루이프가 저런 난리를 겪으면서도 보호해주었던 호마리우는 라우드루프 이적 후 귀신같이 부진에 빠졌다. 비시즌 기간 호마리우는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복귀 후 심각한 부진에 빠졌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원래부터 말을 안 들어먹었는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팀 훈련에 무단 불참하는 등[* 다만 호마리우는 자기 개인 몸관리는 성실히 했던 선수다.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체훈련을 죽도록 싫어한게 문제였다.] 문제 행동은 더욱 심각해졌다. 1993-94 시즌에 무려 라리가 30골을 넣었던 호마리우는 다음 시즌 겨우 4골을 넣었다. 경기 중에 [[디에고 시메오네]]를 가격하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 크루이프는 마침내 호마리우를 갈궈대기 시작했고 심지어 언론에 대고 공개적으로 호마리우를 비난했다. 물론 호마리우도 '네 앞으로 훈련 열심히 할게요' 할 성격이 아니었고 단단히 삐져서 그냥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 결국 1995년 1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해지하고 브라질로 돌아가고 만다. 팀이 침체에 빠지며 저조한 경기력을 펼치자 바르셀로나 팬들은 선수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팬들의 반응은 선수들을 더욱 힘빠지게 했다. 게다가 호마리우와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왔던 스토이치코프와의 갈등도 1994-95 시즌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스토이치코프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기면 크루이프 감독 덕분이고, 패하면 선수들 탓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스토이치코프는 결국 1994-95 시즌 단 6골만 기록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결국 1994-95 시즌 바르셀로나는 수차례 졸전을 펼친 끝에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이 끝나고 쿠만, 스토이치코프 등 그나마 남아있던 팀내 핵심 멤버들도 대거 팀을 떠나 이적하면서 이렇게 드림팀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감독 시절 말년에 팀의 주축인 스타 플레이어들과 모조리 마찰을 일으켰다. 쿠만 정도만 그나마 크루이프와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은 케이스. 오히려 쿠만의 경우 크루이프의 편애로 팀내에서 약간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편애하는 정도를 넘어서 바르셀로나에서 항상 [[토탈 풋볼|네덜란드식 축구]]를 운운하며 쿠만을 네덜란드식 축구를 바르셀로나에 이식하는 시범조교로 삼았다. 다만 쿠만과 잘 지낸것은 쿠만이 문제아들과 달리 성실하고 비교적 온순한 성격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드림팀이 해체된 것은 크루이프의 성격 문제도 크지만 당시 핵심 스타선수들의 성격 자체가 그 어떤 감독이 와도 다루기 어려운 괴짜들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훗날 [[펩 과르디올라|펩]]르사 시대의 핵심인 [[세 얼간이(축구용어)|세얼간이]]와 [[리오넬 메시|메시]]는 워낙 온순한 성격이라 커리어 내내 감독과 큰 불화나 마찰이 없었다는 점과 대조되는 면이다.[* 펩도 사실 크루이프와는 다른 의미로 독선적이고 불통인 성격이라서 [[사무엘 에투|에투]],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이브라히모비치]] 같은 기세고 자존심 부리는 타입의 선수와는 크게 마찰을 빚고 이는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에른 뮌헨]]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아직도 그들은 펩이라면 이를 간다. 반대로 세얼간이와 메시를 필두로 한 라 마시아 황금 유스들의 경우 즐라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선생님을 잘 따르는 기숙학교 학생' 같은 성격이라 펩이 떠나고 다른 감독들이 왔다갔다 해도 딱히 큰 갈등이 없었는데 이는 펩이 크루이프에 비해 크게 복받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크루이프는 과르디올라 같은 신예가 1군으로 올라오면 크루이프는 항상 쿠만을 불러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쳐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현재 바르셀로나식 축구라 부르게 된 이 스타일을 크루이프는 결코 바로셀로나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항상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를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던 축구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로 크루이프 자신과 그리고 아약스, 그리고 네덜란드 대표팀에 의해 구현된 축구였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 크루이프는 경질될 때까지 2년간 무관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크루이프 감독과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결국 크루이프는 1995/96 시즌 말미에 감독에서 물러났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라위프가바르샤에남긴것.jpg|width=100%]]}}} || 좋지 않았던 바르셀로나 감독 말년에도 불구하고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의 역사는 크루이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바르셀로나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나다. 크루이프가 집권하기 전까지의 바르셀로나는 1960-61 시즌과 1985-86 시즌 두 차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올랐으나 모두 패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크루이프가 집권하고 나서 바르셀로나는 자신들만의 철학을 가지며 결국 1991-92 시즌에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했다. 그러나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AC 밀란에게 4:0으로 대패하였다. 그의 철학은 10년 뒤에 크게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2005-06 시즌부터 2014-15 시즌까지 여러 감독들의 감독의 지휘 아래 [[트레블]] 2회를 포함한 UEFA 챔피언스 리그 4회 우승을 거두며 유럽 최고의 축구팀으로 거듭났다.[*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루이프 이후의 30년 동안 거둔 트로피의 갯수가 크루이프 이전의 78년 동안 거둔 트로피보다 많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장장 8년이라는 바르사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동안에 무려 11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선수 시절보다 더 큰 결실을 맺었다.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러피언컵]] 첫 우승은 크루이프에 의해 달성하게 된다. 이런 성과들을 통해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에 이어 역대 최고 감독의 반열에도 든 것이다. 그는 선수단 내부에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상대 팀과의 관계에서 늘 극단적인 지지층과 적대적인 대상을 만들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가 최고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선수들보다 더 화려하게 언론을 장식했다. 몇몇 선수들과 좋지 않은 이별도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0:4로 대패하긴 했지만, 그가 심어놓은 철학과 스타일이 현재까지도 계속 발전하고 계승되어 현재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의 축구를 집대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